마라도 2일 차. 날씨는 좋았지만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간밤에 아내와 통화를 하며 산책을 했는데, 가로등 하나 없는 마라도는 별이 쏟아졌다. 하지만 등대가 너무 밝아서 별을 촬영하는 건 불가능할 듯... 거기다 발이라도 헛디디면 요단강 충분히 건널 수 있을 거 같았다. 밤에는 안 돌아다니는 게 좋을 거 같음.
아침 일찍부터 새를 찾아다녔지만 눈에 띄는 새는 없었고 낯익은 녀석들만 잔뜩 만날 수 있었다.
너무 일찍 나왔나? 그믐달이 떠 있었다.
아직 어스름이 남은 시간인데 나 때문에 쉬고 있던 흰뺨검둥오리들이 날아 오름.
돌아다녀도 새가 읎다... 바람 불어서 다 떠났나?
갈대밭에서는 쇠개개비와 개개비사촌 소리가 들렸다. 이때 갈대 위로 쏙 올라온 녀석.
쇠개개비는 소리만 들리고 얼굴은 안 보여줘서 포기하려는데 [큰밭종다리]가 있다고 얼른 와보란다.
밭종다리 보다 큰지는 모르겠지만 특유의 자세가 눈에 띄었다. 가슴을 펴고 서 있는 모습...
갯바위에서 촐싹거리며 뛰어다니고 있던 솔새사촌. 새가 없어서 그런가 너무 반가웠다.
어제는 안 보이던 흰눈썹황금새가 보인다. 새로 들어온 모양.
등대 옆에서 솔새와 황금새들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새가 한 마리 날아왔다. 할미새사촌!
촬영을 하려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내 카메라를 툭 쳐 버렸다. 허둥대는 동안 바로 앞에 앉아 있던 할미새사촌을 이번엔 카메라가 초점을 못 잡는다... 어이가 없어서...
비매너와 멍청한 카메라의 합작으로 2m도 안 되는 거리에 있던 할미새사촌을 촬영하지 못하고 버벅대는 사이 새는 숲으로 날아가 버렸다. 지금껏 멀리서 촬영했던 사진 밖에 없던 할미새사촌을 눈앞에서 날려 버리자 허망했다...
비매너도 짜증 나고 머리도 식힐 겸 혼자 숲으로 향했는데 혹시나 있을 할미새사촌을 쌍안경으로 찾기 시작. 그런데 찾던 할미새사촌은 아무리 둘러봐도 안 보이고 바로 앞에 이상 놈이 하나 앉아 있었다.
'에이 뭐야 쏙독새? 여기 쏙독새!'라고 사람들에게 외쳐 버리고 다시 할미새사촌을 찾기 시작. 그런데 갑자기 소란해졌다. 내가 [쏙독새]라고 외치니까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아무도 찾지 못하고 있던 상황. 자꾸 쏙독새가 어딨냐고 물어보는 바람에 할미새사촌 찾기는 포기...
근데 가만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한 게, 우리가 여기서 한 시간은 새를 보고 있었는데 그동안 쏙독새가 있다는 걸 아무도 알지 못했다는 거... 그 후 할미새사촌 때문에 전투력이 급상승한 바람에 눈에 띈 상황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것도 어이없음...
얼른 정신을 차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쏙독새 위치를 알려주기 시작. 이날 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쏙독새를 볼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 다들 행복해하는 걸 보니 뿌듯하기도 하고 마음도 누그러졌다.
할미새사촌은 날렸지만 쏙독새의 콧구멍과 콧털을 근접 촬영했으니 등가교환의 법칙 성립인가?
오후가 되자 해가 넘어가기 시작하면서 황금새의 목이 노랗다 못해 시뻘겋게 보였다.
그래도 흰눈썹황금새는 노란색...
이렇게 또 하루가 저물었다. 남들은 마라도 와서 초원멧새도 보던데 나는 쏙독새로 만족해야 하나 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