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지빠귀가 보고 싶다고 노래를 했더니 예전에 뵀던 분이 기억하시고 연락을 주셨다. (감사 감사!)
신나서 이른 아침에 한달음에 달려간 곳은 경기도의 한 야산이었는데, 앞에는 하천이 흐르는 곳으로 새들이 살기엔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그런데 호랑지빠귀 둥지는 등산을 20분은 해야 한다고...
숨이 턱에 찰 즈음 호랑지빠귀 둥지가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근데 여길 대체 어떻게 찾으신겨...
나무 중간쯤 가지가 갈라지는 곳에 둥지를 만든 호랑지빠귀. 어미는 보이지 않고 새끼 4마리만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어린 녀석들이지만 깃털은 알록달록한 게 정말 호랑이를 연상시켰는데 이름 잘 지은 듯...
숨죽이고 한참을 기다려도 어미는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가 있어서 그런가... 살살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데, 주위를 둘러보다가 좀 떨어진 나무에 앉아 있는 호랑지빠귀 성조를 발견했다.
확실히 지금까지 봤던 지빠귀들과 비교하면 큼직하다. 경계심도 많아서 정말 숨도 마음대로 쉬기 힘들었다. 한참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어미 새가 훌쩍 둥지로 돌아왔다.
새끼 몸통의 절반만 한 응가를 쭈욱 뽑아내더니 어미가 꿀떡 삼켜버렸다. 헙...
응가 처리 방식은 종마다 다르다고 하는데, 응가를 물고 멀리 가서 버리는 종도 있지만 호랑지빠귀는 어미새가 먹어 치우는 모양이었다. 응가를 꿀떡하고는 입맛을 다시는 어미새를 보니 내 입맛은 떨어져 감...
내가 품어 주는 걸 신기해 하자 호랑지빠귀와 되지빠귀는 육추 중에도 새끼들을 품어 준다고 함께 간 분이 설명해 주셨다. 둥지를 비워두지 않고 교대로 남아서 새끼들을 품어 준다고 하는데 좋은 생존 전략으로 보였다.
먹이 급여가 끝나면 또 쏜살같이 나무 밑으로 점프해서 사라지는 어미 새. 하루 종일 지렁이 잡기도 힘들 거 같은데 쉬지도 않고 열심이다. 어미 새가 사라진 아래쪽을 열심히 살펴보고 있었는데 아래쪽 풀숲에서 어미 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얘들 지렁이의 습성까지 이용해서 사냥을 하는 거 같았는데 금방 지렁이를 하나 잡고는 이내 사라져 버렸다. 빠르게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지렁이를 찾는 거 같았다.
한창 흥미진진하게 촬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배터리 경고가 뜨기 시작. 어제 만충해서 가져온 배터리 2개 중 하나는 사용도 안 했는데 사용하려고 보니 이미 방전된 상태였고, 남은 배터리 하나로 간신히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이 배터리도 저전압 경고가 뜨기 시작한 것.
배터리에 문제가 생긴 걸까? 최근 들어 배터리 소모가 엄청 빨라졌다. 거의 광탈 수준... 하필 USB 보조 배터리나 보조 카메라도 가져오지 않아서 몇 시간 만에 눈물을 머금고 철수해야 했다...
다른 분들과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하산하려는데, 몇 장 촬영할 수 있으면 내려가는 길에 되지빠귀 둥지가 있으니 들러보라고 위치를 알려주셨다. 아픈 무릎 때문에 다시 산에 오르기 힘든 나는 온 김에 봐야 한다. 쑤시는 도가니를 부여잡고 간신히 되지빠귀 둥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카메라가 켜지고 몇 장 촬영할 수 있었는데, 지렁이 잡아 오는 장면과 암컷이 새끼들을 품어주는 장면을 끝으로 카메라는 완전히 꺼져버렸다. 망할 소니... 배터리가 너무 조루잖아... 거기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카메라가 불덩이다. 배터리가 수명을 다한 모양.
그래도 호랑지빠귀를 보다니 대만족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여름철새라는데 워낙 은밀하게 다니는 녀석들이라 나는 오늘 처음 볼 수 있었다. 그 땡글땡글한 눈망울이 눈에 선함... 또 볼 수 있기를...
아래는 호랑지빠귀 둥지 주변에서 소란스럽게 떠들던 노랑턱멧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