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초였던 듯. 겨울에 올림픽공원에서 자주 뵙던 어르신 한 분을 오랜만에 뵀는데, 고창으로 뿔제비갈매기를 보러 오라고 하셨다. 그 근처에서 농사를 지으시나 보다 했더니 그건 아니라고... 그렇게 멸종위기생물 1급인 뿔제비갈매기를 보러 가야지 가야지 가야지... 하다가 한 달이 훌떡 지나버림.
어르신과의 약속은 이미 물 건너갔고... 마냥 미룰 수는 없어서 5월 초에 계획을 세웠는데 폭우로 취소. 이번주도 오후엔 비 예보였지만 낮엔 그럭저럭 구름만 가득할 거 같아서 아내를 살살 꼬셔서 새벽에 고창 구시포해수욕장으로 속옷 한 장 챙겨 들고 무작정 출발했다.
이렇게 장거리 운전은 거의 10년 만인 듯... 일찍 출발해서 오는 바람에 이른 아침인 해수욕장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모래사장이 있는 해수욕장은 아니고 단단한 뻘로 이루어진 해변이었는데, 동네 주민 분들은 조개를 잡고 계셨다.
나는 그동안 저어새가 멸종위기종(이분도 1급)이 된 이유를 사냥을 대충 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확실히 알았다. 사냥 열라 잘함. 인간들이 서식지 파괴하고 알 훔쳐 먹어서 멸종위기에 몰린 거다... 나부터 반성해야지... ㅠㅠ
검은머리물떼새가 있는 곳은 다행히 번식지로 보호받고 있었다. 나도 멀리서 망원으로만 지켜봤지 가까이 가지는 않았는데, 사진 찍으러 오신 분들이 모두 거리를 잘 지켜주셔서 괜히 뿌듯했다.
갈매기고 뭐고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서 머리털이 다 벗겨질 판이다. 쌍안경으로 갈매기를 훑어보려고 해도 바람이 너무 심해서 시야가 고정이 안된다. 오늘은 안 되겠다 포기... 숙소 잡고 내일 다시 찾아봐야겠다.
그렇게 차로 돌아왔는데, 더웠는지 창문도 열어 놓고 양말도 벗은 채 편하게 앉아서 휴게소표 오징어를 먹고 있던 아내가 나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유 깜짝이야 내가 더 놀랐다. 근데 왜 놀란 걸까?
여차 저차 해서 일단 숙소 잡고 쉬어야겠다고 말하자 고새 다 예약해 뒀단다. 식당도 숙소도. 놀고먹기만 한 게 아니었나 보다. 일단 철수~ 차를 돌려서 다시 해수욕장 쪽으로 나왔는데 오후가 되니까 사람들이 많아졌다. 날이 안 좋은데도 많이들 왔다. 이왕 온 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둘러볼 생각으로 쌍안경만 들고 해변으로 내려갔는데...
전 세계 생존 개체수는 100마리 미만으로 추산된다는 뿔제비갈매기. 그중에 한 마리를 본 거다. 잘 번식하고 잘 보존해서 다음엔 100만 마리 중 한 마리를 봤으면 좋겠다.
해변에 다시 들러보기 잘했지 그냥 갔으면 영영 못 봤을지도 모른다. 마음을 비워야만 볼 수 있다고 하던데 마음을 비웠었나 보다. 못 보면 다음에 보지 뭐 이런 생각이었던 듯... 오늘 멸종위기야생생물 1급만 3종을 봤다. 저어새, 노랑부리백로, 뿔제비갈매기... 모두 멸종 위기에서 후딱 벗어나기를!!
목표종도 봤으니 바로 서울로 올라갔어도 됐지만 오랜만에 아내와 여행다운 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먼저 아내가 가보고 싶다는 영광의 해안도로에 있는 카페를 찾아갔는데 이름이 보리다. 카페보리.
오랜만에 아내와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는 점심 겸 저녁 식사를 위해 호텔 근처인 법성포로 향했다. 카페에서는 차로 30분 정도 거리였는데 가는 길도 절경이었다. 영광이 이렇게 아름다웠구나... 여행 자체를 별로 안 하고 살아왔는데 더 늦기 전에 아내와 여러 곳을 다녀보고 싶다.
영광에 왔으니 식사는 당연히 굴비 정식이다. 유명하다는 식당은 사람들이 많을 거 같아 평이 괜찮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식당으로 정했는데 반찬 하나하나 다 맛있었고 굴비 매운탕은 처음 먹어봤지만 담백한 게 너무 좋았다. 아침도 거르고 늦은 오후에 첫 끼라 허겁지겁 먹고 보니 남은 건 굴비 머리뿐...
식당 사장님, 종업원 분들 모두 엄청 친절하셔서 또 방문하고 싶어졌다. (예전엔 서울도 정말 친절했는데...)
밥을 먹고 나오니까 웬일로 예보대로 비가 왔다. 기상청이 중계가 아닌 예보를 제대로 할 때도 있구나. 중계나하는 기상청은 없애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난데 이 얘기는 정말 할 말이 많으니 나중에 한 번 기회가 되면 하기로...
아내가 예약한 숙소는 저렴한데도 시설이 너무 좋았다. 한껏 들뜬 아내. 자랑하느라 조잘대는 아내가 너무 귀여웠다.
혹시 한 번 더 뿔제비갈매기를 볼 수 있을까 싶어 다시 들러본 구시포해수욕장. 사람은 없고 괭이갈매기들만 쉬고 있었다. 밤에 비가 많이 왔다는데 얘들은 그 비를 다 맞았을 거 아녀... 쯧쯧...
잠깐 둘러 봤지만 뿔제비갈매기는 보이지 않았다. 더 기다려 보고 싶었지만 차 막히기 전에 얼른 올라가야 함. 일단 출발.
국밥에 들어있는 고기도 엄청 많은데 맛 보라며 썰어주신 순대와 간, 염통도 거의 1인분 수준... 아내 국밥의 고기도 먹느라 밥은 남겼지만 고기와 국물은 모두 완식. 엄청 맛있었다.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도 맛집인 영광. 시골의 도로변에 있는 민가를 개조한 허름한 식당인데도 직원분은 또 얼마나 친절하던지... 또 들르고 싶어졌다.
엄청 먹고도 안 졸고 서울까지 잘 올라옴. 밤에 잠을 설쳤다는 아내는 쿨쿨 잤지만 나는 잘 버텼다... 이렇게 별 쓸데없는 얘기만 가득한 영광과 고창 여행기 끝. 여행 목적은 뿔제비갈매기를 보는 거였지만 뜻밖의 수확이 많았다. 다음엔 또 어디를 가볼까? 진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