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뜬금없이 니콘 Z8을 구입했다.
조류 촬영이라면 다들 소니를 선택하거나 소니로 넘어가는 중인데 나는 거꾸로 니콘을 구입했으니 시대에 역행하는 거랄까. 하지만 소니와 캐논 카메라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행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호기심이라는 게 맞는 거 같다. 다양한 카메라를 사용해 보는 것도 이 취미가 가진 재미의 일부니까 말이지.
니콘은 나의 첫 카메라이기도 하다.
내가 처음 사용해 본 SLR 카메라는 이모부의 펜탁스 MX였다. 정말 망치로 사용해도 될 정도로 단단하고 사진도 잘 나왔던 카메라. 이후 내 카메라를 갖기 위해 대학시절 없는 돈에 학비 버느라 죽어가는 와중에도 밥을 굶어가며 조금씩 모아 구입했던 첫 카메라가 니콘 FM2였다. 완전 수동인 필름 카메라였지만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거 같았는데...
니콘은 나에게 그런 브랜드다. 처음 구입했던 디지털카메라도 니콘 Coolpix 4500이었으니까 말 다했지. 하지만 디지털카메라 시장에서 니콘이 밀리면서 이후 주로 사용하게 된 카메라는 캐논이었고, 미러리스 세상이 오면서는 소니로 넘어오게 된 것.
현재는 소니가 메인이다.
메인으로 사용하는 소니의 A1M2는 AF 훌륭하고 가볍고 망원렌즈 라인업도 좋다. 서브로 사용하는 캐논 R1은 정말 최고의 카메라라고 생각한다. 조작감 최고, EVF 최고, AF와 물체 인식 최고. 무엇보다 손맛 최고. 개인적으로는 소니보다 좋다고 생각하지만 캐논은 가벼운 망원 단렌즈가 없다. 소니처럼 300mm 단렌즈만 내줬어도 니콘은 생각 안 했을지도 모른다...
현재는 주로 소니 300mm 단렌즈에 2배 텔레컨버터를 붙여 사용하는데, 2배 텔레컨버터 때문에 화질 손실이 크다. 그래도 600mm 줌렌즈들은 비비지도 못할 정도의 화질이긴 하지만 600mm 단렌즈에는 비길 수 없다. 가까운 대상은 화질 손실이 적지만 거리가 조금만 멀어져도 열화가 심해지고 화질이 뚝 떨어졌다. 화질 때문에 600mm f/4.0 단렌즈도 들고 다녀 봤지만 체력적으로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눈을 돌린 게 니콘.
니콘은 400mm f/2.8, 600mm f/4.0 단렌즈 외에 600mm f/6.3, 800mm f/6.3이라는 PF(Phase Fresnel : 위상 프레넬) 렌즈를 사용한 가벼운 단렌즈도 있어서 망원렌즈 선택의 폭이 넓다. 나는 가벼운 단렌즈를 원했으니까 니콘이 딱 이었던 셈이다.
그럼 이 단렌즈에 사용할 카메라가 필요한데...
서론이 길었는데, 왜 Z8을?

원래는 Z9를 구입할 생각이었는데, 무게(본체만 1.1kg) 보고 바로 포기. GPS 등 몇 가지 기능을 빼고 나머지 성능은 동일하게 유지했다는 Z8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하지만 Z8도 910g으로 캐논 R1 920g, 소니 A1M2 658g과 비교하면 가볍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Z8의 첫 느낌은 투박하고 크다.

단점인 바디 크기가 그립감이 좋은 장점으로 승화된 케이스. 하지만 버튼 조작감은 좀 조잡함... 캐논의 고급스러움은 없고 소니 보다도 못한 싸구려 느낌이 물씬 나는 질감과 조작감.
거기다 과거부터 니콘의 최고급라인에만 사용한다는 원형 접안부는 괜히 원형으로 디자인해서 공간만 차지함. 융통성 없는 일본을 보여주는 느낌... 주변 고무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햇빛도 막아주지 못해 눈부시다. 차라리 EVF나 고화소로 하지...
정말 짜증 나는 EVF...
소니와 캐논 플래그십들의 EVF는 모두 944만 화소인데 니콘은 Z9나 Z8이나 동일한 369만 화소다. EVF 화질 정말 엄청 구리다. 처음 들여다 보고 현타가 왔을 정도. 이걸로 초점이 잘 맞았는지 확인이 되기는 하나??? 잘 못 샀다는 후회가 바로 밀려듦...
덩치는 큰데 버튼이 부족함.
AF-ON 옆의 버튼도 DISP 버튼 외에는 없... 이것도 현타 올 정도로 컬처쇼크... 전면에 있는 두 개의 펑션 버튼으로 어떻게 해 보라는 거 같은데 적응의 문제라기보다는 디자인의 문제다. 휠도 없는 주제에 이 큰 바디에 할당할 버튼이 너무 부족하다.

잘 들여다보지도 않는 상태창 말고 휠이나 좀 넣어주지... 무게도 많이 나가는데 외형이나 디자인은 빵점이다.
메뉴 폰트도 충격적...

이 무슨... 쌍팔년도 폰트를 아직도...
메뉴도 복잡하다고 생각했지만 적응하면 나름 편하긴 함. 그래도 너무 중구난방이라 적응하기가 좀 힘들었다.
그래도 장점이 있음.
이런 니콘 Z8에도 장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반응속도다.
소니 A1M2는 전원을 켜면 초점을 잡기 시작하는 데 까지 평균 2초. 아주 돌아 버린다. 그나마 대기모드에서 돌아오는 속도는 좀 빨라서 1~1.5초 정도. 그래서 뭔가 벌어질 거 같으면 미리 셔터 버튼을 슬쩍 눌러서 대기모드를 해제해 놓는 게 일이다. 캐논 R1은 소니보다는 빠르지만 그래도 멈칫하는 시간이 있다. 대충 0.5초라고 해두자.
그럼 니콘 Z8은?
전원 켜면 그냥 켜지고 바로 AF 추적 시작. 0.1초도 안 걸린다. 대기모드도 마찬가지. 그냥 철컥하면서 바로 추적 시작. 진정 개빠름. 이건 칭찬해야 한다. 이게 카메라지... 다른 브랜드는 전자제품이라면 니콘은 카메라다.
그럼 가장 중요한 AF는? (조류 촬영 한정)
사실 걱정 많이 했다. 하도 욕하는 사람이 많아서 AF가 쓰레긴 줄... 근데 꽤 괜찮다. 아니 아주 괜찮았다. 너무 기대를 안 했나??
샘플을 좀 보자면... (600mm PF 렌즈 조합으로 촬영)

이런 대상도 빠르게 새로 인식하고 눈 추적을 시작하는데, 앞에 나무가 있지만 새의 눈에 제대로 초점을 잡아준다. 이런 경우 캐논 R1은 80% 정도 성공이고 소니 A1M2는 100% 실패다. 소니는 스팟으로 몸통을 겨눠 초점을 잡아야 함.

비슷한 색감에 묻혀있는 새도 잘 찾는다. 캐논은 하얗거나 검정색이면 초점이 잘 안 들어가고, 소니는 물체 인식 자체가 안된다.

물론 진득하게 초점을 유지하지 못하고 중간에 이렇게 튀는 경우가 자주 발생. 소니는 이런 경우 초점을 놓치는 경우가 없다.

날이 흐려서 오히려 흰색 대상을 잡기는 수월했겠지만, 대비가 낮은 흰색 대상도 잘 잡았다. 캐논은 이런 대비가 낮은 대상은 밝은 날이면 높은 확률로 버벅거린다. 소니는 그런 문제없음.

복잡한 바닥에 있는 검은색 새의 인식도 잘했다.

새가 고개를 돌려 눈을 찾지 못하면 몸통을 인식을 해야 하는데, 뒤편으로 초점이 빠지는 점은 아쉬웠지만,

눈이 다시 보이니까 바로 새에게 초점을 맞춰줬다.
동일한 상황이라면 캐논은 물체 인식이 성공했다고 표시되더라도 초점이 안 들어가는 일명 구라핀이 많이 발생하고, 소니는 복잡한 바닥에 있는 대상을 잘 찾지 못한다. 이런 경우 소니는 무조건 수동으로 조준해야 함.

이렇게 대비가 낮아 새의 눈을 찾기 힘들 것 같은 상황에서도 니콘 Z8은 눈을 찾아 초점을 유지시켜 줬다.


복잡한 배경 속의 대비가 낮은 대상도 초점을 잘 잡아준다. 아주 기대이상이다.
가장 놀라웠던 건 동체 추적인데,

말똥가리가 나무 사이를 날아가는 장면을 촬영한 건데, 나무 밖에서부터 추적을 시작한 게 아니고 나무 사이를 날고 있을 때 조준했는데도 말똥가리에 초점을 맞춰줬다. 여기서 감동....

멧비둘기는 나무 밖에서 추적을 시작했고 나무 사이를 날고 있어도 초점을 잘 유지해 줬다. (물론 설정에 따른 성능 차이도 있을 거다)
동체를 추적하는 능력은 소니가 최고라고 알려져 있다. 그다음이 캐논이고 니콘이 꼬라비. 다들 그렇게 얘기하길래 그런 줄 알았는데, 사용해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일단 처음 초점이 대상에 들어가는 속도는 니콘이 가장 빨랐다. 그다음이 캐논이고 의외로 소니가 꼴찌.
소니는 처음 대상을 인식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 촬영자가 중앙에 대상을 예쁘게 도입하지 않는 한 그렇다는 거. 하지만 니콘은 화면 안에 대상이 있으면 빠르게 찾아줬다. 이건 캐논도 그런데 니콘이 더 빠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후 유지하는 능력은 캐논이나 니콘이나 비슷했고 소니는 일단 인식이 되고 나면 유지하는 건 아주 잘한다.

초기 인식이 빠르다 보니 날아오는 대상도 멀리부터 빠르게 촬영이 가능했다. 캐논과 소니는 기술이 조금 필요함.


이렇게 출발하자마자 들이대도 니콘은 바로 인식하고 추적해 줌.

복잡한 배경 앞을 날아가는 대상도 인식을 잘했다. 이런 경우 캐논과 소니는 인식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새가 지나가 버리는 경우가 많음.

역광의 대상도 잘 인식했다. 소니와 캐논도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잘 인식하는 편.

복잡한 물체와 섞여 있는 대상도 잘 인식했고 유지도 잘해줬다. 동일한 상황에서 소니는 물체 인식은 반반, 하지만 초점은 대상에 잘 맞춰 준다. 캐논은 물체 인식은 잘 하지만 초점 유지가 쉽지 않다.

가장 어려워했던 장면은 물먹는 장면. 초점의 대부분을 놓치고 말았다. 여러 번 시도 끝에 성공한 장면. 이럴 땐 물체 인식보다는 스팟으로 대상의 몸통을 겨누는 게 성공 확률이 높았을 거 같다. 캐논과 소니도 물체 인식으로는 쉽지 않았을 듯...
니콘 Z8의 AF는 기대 이상이다. 재밌는 건 촬영하면서 계속 실망했다는 거. 초점이 맞지 않은 줄 알았는데 사진을 컴퓨터로 불러오고 나서야 초점이 잘 맞았다는 걸 알았다. 다시 말하지만, 니콘 Z8의 EVF는 정말 쓰레기다.
하지만 니콘 Z8의 AF는 어디 가서 욕먹을 수준이 아니었다. 아주 잘한다. 물론 진득하게 유지하는 건 부족했다. 하지만 순간적인 초점을 아주 잘 잡아 줬고 복잡한 배경의 대상이나 복잡한 배경 뒤의 대상 그리고 대비가 낮은 대상도 초점을 잘 잡아줬다.
이 정도면 Z8의 AF는 불만 없다. 여전히 내 기준의 조류 촬영 AF는 소니 A1M2가 최고지만 거의 근접한 성능은 캐논이 아니라 니콘 Z8이다. 캐논 R1이 제일 못함. 이런 결과는 예상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동영상 손떨방은 어떨까?
니콘 Z8 + 600mm PF로 촬영한 홍여새 영상
캐논 R1 + RF100500mm 조합에서 500mm로 촬영한 아물쇠딱다구리 영상
소니 A1M2 + 300GM + 2x TC로 촬영한 파랑딱새 영상
영상 퀄리티를 볼 필요는 없다. 촬영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손떨림 정도만 확인하면 되는데, 모두 손으로 들고 촬영했고 눈높이 정도의 대상을 촬영한 영상이다. (소니와 니콘은 600mm고 캐논만 500mm다.)
※ 참고로 캐논 R1은 중앙부 8.5 스톱, 주변부 7.5 스톱, 소니 A1M2는 중앙부 8.5 스톱, 주변부 7 스톱, 니콘 Z8은 중앙 6 스톱이다.
캐논 R1이 유리한 환경이었지만 정말 훌륭한 손떨방을 보여줬고, 6 스톱 밖에 안 되는 니콘 Z8이 의외로 뛰어난 손떨방을 보여줬다. 반면에 8.5 스톱인 소니 A1M2는 아주 개판으로 손떨방이 아주 쓰레기인 걸 알 수 있다. 삼각대 없으면 소니는 동영상 포기.
종합해 보자면...
지금까지 살펴본 것만 봐도 니콘 Z8은 조류 촬영에 아주 적합한 카메라다. 아주 훌륭한 AF를 가지고 있고, 다양한 상황에서 물체 인식도 아주 좋았다. 무엇보다 동체 추적에서 탁월한 성능을 보여줬는데, 가려진 대상도 즉시 인식하고 추적하는 성능은 깜짝 놀랄 정도였다.
모든 카메라가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지만 내가 원하는 기능과 성능에 Z8은 충분했다. 최고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많은 부분에서 크게 떨어지지도 않았다. 거지 같은 EVF만 아니었으면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텐데 정말 아쉬운 부분이다. (EVF를 들여다보고 있자면 정말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짐...)
투박하고 무겁고 조작감 거지 같고 쓰레기 EVF에 훌륭한 AF
내가 생각한 Z8을 한 줄로 표현한 거.
하지만 소니 A1M2와 R1의 반값. 이거면 끝이다. 성능은 거의 동급인데...
거기다 니콘은 망원렌즈 라인업이 예술이라 선택의 폭이 넓음.
조류 촬영 밖에 몰라서 다른 분야는 어떨지 모르지만 조류 촬영에 이만한 카메라 없다. 강추!
노인들만 사용한다는 낡은 이미지 개선과 상품성만 좀 더 올리면 대박일 텐데... 정말 아쉬운 부분...
다른 건 몰라도 EVF는 좀 어떻게 해 봐라 니콘...
끝.
